Happiness
한국의 어린이들은 요즘 너무 자기 시간, 놀 시간이 없이 계속 학교나 유치원, 그후에는 학원을 줄줄이 다니고 또 한 자녀만 있는 가정이 늘고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아이처럼 노는 법을 배우는 학원이 또 생겼다고 합니다. 밖은 위험하니까 실내로 가서 정화된 공기를 마시면서 선생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놀이터를 꾸며놓고 친구들과 노는 거죠. 그런데 슬픈 점이라면 이런 것도 아이가 놀지 못하는 게 딱해서 데려온다기보다는 아이가 이렇게 해서 사회성을 기르면 좋고 또 이렇게 감성적인 발달을 하는 게 성인이 되면서 더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라고 합니다. 즉 노는 것도 경쟁과 실력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죠.
Quote by Aristotle. Source: Quotefancy
미국은 아직까지는 어린이들을 노는 것을 가르치는 학원에 보내지는 않는 것 같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열중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행복하기입니다.
이 happiness, 행복이라는 개념은 서양사상에서 정말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왔는데요. 고대 Greece의 철학자 Aristotle도 그 자체가 목표인 것은 행복이 유일하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사람이 목표로 하는 다른 것은 그 뒤에 목적이 또 있다는 것이죠. 돈을 버는 게 목표가 아니라 그 돈으로 무엇을 사는 것, 건강 그 자체가 목표라기보다는 그래서 장수하는 것 등등,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는 내용인데요. 여기서 함정은 Aristotle이 뜻하는 happiness와 우리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happiness가 약간 다른 것이라는 점입니다. Aristotle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논리적 사고로 보고, 그것을 할 때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게 안 되면 차선책으로 도덕적인 삶을 꼽았는데요, 그런 면에서 동양의 맹자와도 통하는 면이 조금 있다고 하겠습니다. 맹자는 미덕과 선함이 있는 삶에서 행복을 얻는다고 했고, 특히 그 과정에서 음악을 중요시 여겼다고 하네요.
미국 독립 선언문은 모든 인간에게 있는 권리 셋을 들고 있는데, 나중에 3대 대통령이 된 Thomas Jefferson이 썼다고 하는 이 권리는 life 삶, liberty 자유, 또 the pursuit of happiness 행복의 추구입니다. 좀 재미있는 것이 삶과 자유는 그냥 그 자체가 권리라고 한 반면, 행복은 그 자체가 권리가 아니라 그것의 추구라고 명확히 하고 있죠. 한국에서도 기본권이라고 해서 1980년에 이 행복추구권이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이 happy라는 말을 참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영어단어를 그대로 쓴 “해피 추석”이라든가 “해피 설날”이라는 말도 이제는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영어에서도 happy가 들어가는 표현이 몇 있습니다. 우선 “happily ever after”라는 말은 동화의 끝에 많이 나오죠. “행복하게 영원히”라는 뜻으로,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라고 하면 오래오래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또 “happy-go-lucky”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이것은 뭘해도 흥, 흥, 좋다고 하는 easygoing인 사람에게 쓸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 친구가 잘 쓰는 표현으로 “happy as a clam”이라는 관용구가 있는데요, clam이 조개인데 왜 행복해한다고 하는지 궁금하시죠? 원래는 이게 “happy as a clam in high water”또는 “happy as a clam at high tide”라는 말이었습니다. 즉 밀물때니까 조개가 물 안으로 들어가서 잡힐 염려가 없는 거죠. 안심하고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완전히 쓰는 경우가 정말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She’s happy as a clam wearing her new glasses.” 새 안경을 끼고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 라는 말입니다.
나라마다 행복지수도 생겼고, 자연히 따라서 부러움과 경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행복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미국에서 행복은 종교, 인종, 계급 등의 구분을 떠나서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목표이기도 하죠. 다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면 누구에게선가 지탄과 비난을 받을 수가 있지만, 행복이라는 건 다 인정을 하기 때문인데요. 그러다보니 나는 돈은 없지만 행복해, 내 아이는 공부를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해, 등등의 말을 할 수 있게 되는데요. 즉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은 나보다 부자이지만 더 행복한 건 나다,라는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happiness에 붙은 premium이 ‘60년대 이후로 불어온 자기 성찰, 계발의 붐과 만나서 행복 수업이라는 industry를 탄생시켰는데요. 즉 행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죠. 마치 한국 아이들이 노는 것을 배우는 것처럼요. 다들 행복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의미있는 삶 역시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 행복법에 보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좋은 일을 하는 것, 또 건설적인 일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행복이 경쟁이 되니 덜 행복한 사람은 이중으로 불행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덜 행복한 이유가 되는 내 사정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안 좋은데, 거기다가 내가 남보다 덜 행복하다는 걸 알면 어떡하겠어요. 아주 큰일이죠.
그런데 뭐가 행복이다라는 것이 문화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도 시시각각 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행복의 크기를 재어서 비교할 수 있을까 하는 게 제 의문이고요. 사실 행복한가 아닌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느정도 행복이라는 발판이 없이는 할 수 없지않나 합니다. 내일이 마침 UN이 제정한 the International Day of Happiness 국제 행복의 날인데요. 저는 내가 아무개보다 더 행복한가에 촛점을 두기보다, 행복에 관해 생각을 할 수 있는 겨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에 촛점을 두고 싶습니다.
Pharrell Williams의 “Happy”가 떠올랐는데, 어차피 수십 번 들으실 것 같아서, 조금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대신 제가 최근 들은 노래중에서 처음 듣고 제일 행복한 기분이었던 곡을 같이 듣고 싶습니다. “Uptown Fu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