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athy
Texas주 Houston 지역을 강타한 Harvey의 피해가 큰데요. 그리고 당연히 sports 경기 같은 건 취소가 되었을 것 같은데, 반반입니다. 아직 정식 season이 시작하지 않은 NFL은 Houston에서 열릴 예정이던 preseason game을 취소했고, 이번주에 시작하는 대학 football은 한두 게임이 연기되거나 장소를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막바지로 달려가는 pro야구는 이번주에 장소를 옮겨서 진행이 되었죠. 마침 이번주 내내 Houston이 host을 하는 schedule인데, 주중에는 경기를 할 여건이 되지 않아 Florida Tampa에서 시합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수습이 된 이번주말에는 Houston에서 the Mets와 series을 치른다고 합니다.
이런 소식을 접하시면서 조금 놀라신 분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10여년 만에 가장 큰 태풍이고 인명과 재산피해가 심한데 어떻게 이런 sports을 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게 사실 미국인이 재난이나 비극에 대응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자연재해는 물론이고, 정치적으로 발생한 상황이라든가, terrorism의 가능성이 있어도 그것에 굴해서 자신들의 평소 생활 pattern을 바꾸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인 거죠. 또 이런 볼거리를 제공해서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주고, 여기서 생기는 수익을 수해를 돕는데 쓰기도 하는 등, 실제적인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역시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이해가 쉽게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집이 물에 잠겼는데 옆동네에서 야구 시합을 한다고 하면 섭섭할 것 같고, 내 친구가 피해를 봤는데 야구장에 구경하러 가면 미안할 것 같거든요. 물론 미국인중에서도 그런 분이 있겠지만, 다수의 사람이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이렇게 일상적인 게 나오면 안정을 찾고 재기하려는 결심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크게 보편화해서 본 한국과 미국의 차이라고 하겠는데요. 저희 educhora에서 consulting을 받으시는 분들은 “미국사람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저희에게 미국사람들 이상하지 않느냐고 동의를 구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미국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한국사람이 이상할 수도 있겠죠. 즉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고 하겠는데요.
여기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상하다는 것은 미국인들의 습관이나 방식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그에 대한 반응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오래 사신 분 중에서도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하죠. 예를 들어서 공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젊은 사람이 어르신을 first name으로 부르면서 어깨에 손을 얹는다든가 하는 행동을 할 경우, 한국인은 그걸 보고 그 어르신이 싫어도 그냥 참아준다고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그 어르신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죠. 또는 drama에서 어떤 사람의 전 애인과 지금 애인이 서로 그 사실을 알지만 친구로 지낸다는 설정이 있으면 그건 말도 안돼, 현실성이 없다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부자가 형제자매를 돕지 않으면 이상한 거고, 친자가 아닌 step-children을 예뻐하는 사람을 보면서 저건 대외적인 show라고 단정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말이 왜 나올까요? 이런 상황을 다 자신의 기준에서 보고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영화의 인물이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는 지를 보고 공감이 간다, 아니다, 또 그 인물이 와닿는다, 아니다를 논하는데요. 이 역시 자기라면 어떻게 대처할까를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런 경우 공감대를 형성해서 성공을 하기 쉬운 방법으로는 그 인물을 가장 보편적으로 그리는 거겠죠. 올해 상반기 한국에서 화제가 된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 있는데요. 실제로 82년생 한국 여성중에 지영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다고 하죠. 거기서 아실 수 있듯, 이 김지영이라는 인물은 그 세대의 전형적인 한국여성을 대표한다고 하겠는데요.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너무 불쌍해서 울었다는 여성 독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운 이유는 그게 자기얘기같아서이죠. 그 인물이 너무 와닿은 거예요. 이럴 때 relate이라는 동사를 써서 “I totally relate to that character” 그 인물을 정말 잘 알 것 같다,라고 하기도 하는데요.
이 소설에서는 의도적으로 이 인물을 가장 전형적으로 만들어놓았죠. 그래서 당연히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는 거고요.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실재의 인물은 전형적이지 않은 부분이 많고, 또 허구의 인물도 특징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아마도 나와 다르게 반응하는 사람일텐데요. 그럼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나와 다른 성격이나 사고방식을 가졌으니 아예 친하게 지내지 않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고쳐놓아야 한다는 분도 있겠죠. 그러나 이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는 그 사람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그 사람들의 기준에서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즉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가 아니라, 상대방의 구체적인 background와 성격과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는 거죠. 즉 “나라면 그렇게 안해”에서 “너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의 입장에서 타인의 상황을 고려하는 것을 empathy라고 하는데요. 이것과 자주 같이 거론되는 단어로 sympathy가 있습니다. Sympathy는 한국어로 동감이라고 번역을 하시는데, 다른 사람의 사정에 같이 대부분 슬퍼하는 걸 말하죠. 그러나 여기서는 그 사람의 입장일 필요는 없고, 안됐다,라는 감정이라거나, 또는 나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면 이정도 슬플 것 같으니 너도 그렇겠구나,라는 거고요. Empathy와 sympathy는 미국인들도 많이 헷갈려하는 단어인데요. Empathy는 사실 20세기 전에는 영어에 없던 말입니다. 독일어의 Einfühlung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한국어로는 공감, 감정이입 등으로 번역이 되는데 제 경험으로는 그렇게 번역을 해서 이해를 하려고 하면 더 혼란스럽고요. 그냥 나와 다른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라면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이렇게 나오겠구나,라고 짐작을 해서, 그사람이 이상하거나 이해가 안된다는 느낌을 줄이는 거죠. 이건 나와 다른 사람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게 아니라, 그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떨까를 생각해본다는 말씀입니다. 이건 어느 사회에서나 유용한 덕목이지만 특히 이민자로서 미국에서 살아갈 때 미국인을 우선 한국인과 대비하여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요. 또 미국인들 자신도 워낙 다양하다보니 개개인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 다르게 반응이 나오고 그걸 즉각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개인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기도 하죠. 미국의 개인주의는 이렇게 이기주의나 홀로족과 또 다른 이런 면도 있습니다. 앞으로 누구 이상해,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이 empathy라는 단어를 떠올리시는 것은 어떨지요?
오늘 노래는 미국과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Canada의 국민 가요라고 불리는 곡입니다. 이분들은 왜 이 노래를 사랑할까요? “Four Strong Winds,” Neil Young의 노래로 들으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