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lem Part II
지난주에는 Harlem에 대해 말씀을 나누면서 the Harlem Renaissance을 언급만 했는데요. 오늘은 그 시대의 중요인물에 대해 조금 알아보고, 그 후의 Harlem과 지금 진행중인 Harlem Week까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The Harlem Renaissance이라는 것은 보통 1919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중반까지 Harlem에서 흑인 문화가 부흥한 시대를 일컫습니다. 백인의 가벼운 유흥을 위한 흑인의 공연에서 벗어나서 흑인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거나, 적어도 흑인의 예술성이 백인의 그것과 같은 기준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거죠. 물론 쉽지는 않았고, 그 과정 자체가 또 이 시대 예술작품에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생각이 있는 흑인들이 모여서 예술을 통해 자신들을 단결하고 계몽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미국의 문화의 일부분으로 만들었다는데 의의가 있겠죠. 여기서 예술이라는 것은 대중예술도 포함한 것으로, 이렇게 처음부터 미국의 흑인문화에서는 대중문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 존경을 받았고 자기들 사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 예로 Ossie Davis이라는 배우가 있었는데 사회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TV, 영화, 연극에 출연한다는 게 사회지도자로서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았죠. 이분은 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피살된 다음날 Manhattan에서 흑인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기도 했고요, Malcolm X의 장례식에서는 eulogy 조문을 낭독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전, the Harlem Renaissance 시절의 주역으로서 정말 여러 방면으로 재능이 있던 사람이 있습니다. Paul Robeson이라는 분인데요. 이분은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Adam Clayton Powell Jr.와 마찬가지로 목사님의 아드님이었고요. Rutgers 대학에 재학 당시 유일한 흑인이었습니다. 그리고 football star였고, debate team에서 활약을 했으며, 노래도 잘해서 그걸로 돈을 벌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공부도 잘해서 졸업할 때 valedictorian에 뽑히기도 했죠. 요즘도 많이 쓰지는 않는 말인 것 같지만, 한마디로 엄친아였던 거죠. 그리고 Columbia 법대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NFL에서 선수로 뛰기도 했습니다. 또 연극무대에도 서고 노래도 계속 합니다. 이런 사람한테 요즘 쓰는 말이 있죠. 이사람 실화냐? 믿기 어렵죠. 그러나 진짜입니다. Law degree을 따고 졸업한 후에는 연극을 중점적으로 하는데요. 노래를 잘 했지만 처음에는 musical이 아니라 Eugene O’Neill이나 Shakespeare같은 정극의 주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concerts도 열었고요. 그러나 이분이 대중에게 알려진 계기는 musical 영화입니다. Show Boat이라고, 인기있는 소설을 Jerome Kern과 Oscar Hammerstein II가 musical화한 작품인데요. 여기서 이분이 부른 “Old Man River”는 아직까지 남자 bass이라면 꼭 부르고 싶은 욕심이 날만큼 낮은 음역대와 가슴뭉클한 가사가 매력인 곡입니다. 19세기 말 미국 남부지방 흑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부르는 노래인데, 끝부분에 “Ah’m tired of livin’ / An’ skeered of dyin’”이라고, 살기엔 지쳤고 죽기는 두렵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분의 목소리와 정말 잘 어우러집니다. 이분은 그뒤에는 20세기 중반에 미국을 뒤흔든 the Red Scare로 인해 blacklist에 오르고, 그후로 외국에서 공연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영국이라든가 당시의 the Soviet Union에서 큰 환대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Carnegie Hall에서 한 공연을 들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흑인으로서의 자존감을 언제나 가지고 사신 분이었고요.
Paul Robeson인 노래와 연기 부문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면, 문학 쪽에서는 the Harlem Renaissance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분이 있습니다. Langston Hughes이라고, 시인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가입니다. 이분 역시 Columbia 대학에 입학하면서 Harlem으로 와서 주민이 되었죠. 흑인도 백인과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게 이분의 사상이었고, 그렇다고 역차별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는 주의였죠. 내가 쓰는 글을 백인이 좋아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으며, 흑인이 좋아해주면 기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는데요. 이분의 작품은 대부분 평범한 흑인이 주인공으로, 흑인의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써 흑인도 백인과 마찬가지로 장점과 단점이 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또 교육을 받거나 부자인 흑인보다는 중하류층의 흑인의 생활에 더 촛점을 맞췄고요. 지난주 말씀드린 NCAAP에서 발간한 잡지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또 “jazz poetry”라는 것을 처음 시도한 사람 중 하나인데, 이건 jazz에서 improvisation 즉흥연주를 하듯이 즉석에서 쓴 것처럼 보이는 시를 말합니다. 후대의 Beat poetry라든가, hip hop의 rap이라든가, poetry slams 등이 여기에 뿌리를 뒀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이분의 작품 중에 “I, Too”라고 흑인 가사도우미인 화자가 나도 백인인 주인 가족들과 같은 사람이다, 라고 얘기하는 시가 있는데요. 작년 9월에 North Carolina Charlotte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진 다음날 the New York Times에서 이 시를 신문 한 면 전면에 싣기도 할 정도로, 아직도 영향력이 유효한 분입니다.
이 Harlem Renaissance은 너무 백인사회에 동화하려 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후 흑인 운동과 흑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죠. 이게 없었다면 60년대 인권운동, 70년대 hip hop 등 흑인의 문화가 탄생하고 인기를 얻기 어려웠을 겁니다. Hip hop은 1973년에 the Bronx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졌는데, 이건 흑인들이 자기네들만의 문화를 만들어서 그걸 반대로 전세계 사람들에게 유행시킨 거죠. 비주류 문화는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진행중인 the Harlem Week Festival은 비슷한 시기인 1974년에 시작했는데요. 당시 범죄와 마약으로 최악의 상태이던 Harlem을 떠나지 않고 지킨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 하루 festival로 시작해서 지금은 4주짜리입니다. 올해는 이번 일요일 “the Harlem Day”가 있고요, 마지막 날인 다음주 토요일 26일에는 the Charlie Parker Jazz Festival이 열립니다. 야외 행사는 다 무료이니까 한번 가보시는 것도 좋겠고요. 또 Harlem 지역 entertainment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는 the Apollo Theater에서도 Harlem Week을 맞아 특별 공연이 있다고 하는데요. 이 극장에서는 옛날부터 Amateur Night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걸 통해 debut를 한 흑인 musicians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쟁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중에는 jazz vocalists 중에서 여성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Sarah Vaughan과 Ella Fitzgerald도 포함되었는데요. Ella Fitzgerald의 경우에는 원래 춤을 추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전 무대가 너무 춤을 잘 추는 바람에 급히 마음을 바꿔 노래를 했다고 하죠. 그 전 무대 팀을 찾아서 개인적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늘 노래는 Ella Fitzgerald의 목소리를 골라봤습니다. “Skylark”이라는 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