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chester by the Sea
매년 이맘때가 되면 물론 holiday shopping이나 학기말 시험, 연말 정리 등으로 다들 바쁘시죠. 그런데도 날씨가 이렇게 추워지면 따뜻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12월에는 바쁜 와중에도 영화를 보러 가는 분이 많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연말에 소위 작품성이 있는 영화가 쏟아져나오곤 하죠. 연초에 있을 Academy 시상식 후보로 오르려면 calendar year로 2016년에 개봉을 한 영화여야 하는데, 최근에 나온 영화일수록 사람들이 기억하는데 더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연말에 나오는 영화의 대부분은 여름에 개봉하는 blockbusters와는 대조적으로, 친근하면서도 심각한 주제를 다룬다거나, 특수효과보다는 연기에 중점을 둔다거나 하죠. 오늘은 그중에서 올해 많은 상을 받은 작품에 대해 말씀드리고,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이 최근 미국의 상황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도 알아보겠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Manchester By The Sea입니다. Kenneth Lonergan이라는 분이 각본을 쓰고 감독도 했는데요. Massachusetts주의 동북쪽에 위치한, 실재하는 마을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바다에 접한 곳이고요. 주민은 5~6000명 정도로, 작은 동네입니다. 실제로 여기에서 촬영도 많이 했다고 하죠. 그리고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Casey Affleck도 Massachusetts주 출신이라서 아마도 그 동네의 억양을 익히기가 비교적 쉬웠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Boston에서 custodian/janitor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집은 한국에 사시는 분들에게도 익숙한 반지하이고요. 그리고 반사회적인, 부적응적인 면을 보여서,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도 싫어하고, 건드리지 않아도 자기가 먼저 싸움을 걸고 합니다. 그럴 때 나오는 말은 반이 욕이라고 보시면 되고요. 어느날 고향인 Manchester-by-the-Sea에 살던 자기 형이 갑자기 사망하는 일이 생기고, 얼른 달려갔더니 글쎄 형이 자기를 아직 10대인 형의 아들, 자기 조카의 guardian으로 지명을 해놓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미국에는 이렇게 guardian이라는 제도가 있죠. 한국어로는 후견인, 보호자라고 하겠는데요. 미성년자이거나 그외 장애 등으로 자신 혼자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경우에 guardian을 필요합니다. 물론 미성년자라면 대부분 부모님이 계시겠지만, 아닌 경우, 또는 계시더라도 키우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어떤 이유에서든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경우에 legal guardian을 정하게 되는데요. 친척일 수도 있고, 법정에서 따로 정해주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미성년자에게는 부모와 동급으로 여겨진다고 하겠고요.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여행을 가거나 sports club에 들 때 동의서나 허락을 받는데, 이런 경우 보통 부모님이나 guardian이라고 써있습니다.
어쨌든 이 세상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고역인 주인공에게는 아무리 옛날에 예뻐하던 조카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과 같이 지내고 대화하고 그 사람을 책임까지 져야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죠. 그러나 어쨌든 장례 등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당분간은 고향에서 조카와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되고요. 자연히 조카의 주변 사람들과도 만나게 되고, 자기가 과거에 알던 사람도 다시 보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관객은 이 주인공이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된 이유가 되는 과거의 사건을 알게 되죠. 줄거리는 대충 그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결말이 어떨지 약간 예상이 되실 수도 있는데요. 과연 그럴지 궁금하시면 직접 관람을 하시면 되겠고요. 주인공 외에도 조카로 나오는 Lucas Hedges라는 배우와 역시 많은 찬사를 받고 있는 Michelle Williams도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Lonergan 감독은 예전에 Hitchcock 감독이 한 것처럼 영화마다 자신이 잠깐 출연하기도 합니다. 사실 감독보다는 영화와 연극의 작가로서 더 명성이 높은데요. 그래서 screenplay를 쓰면 배우들은 거기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그대로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실제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시게 되면 대사가 잘 안 들릴 때가 있습니다. 영어를 몰라서가 아니고요. 우선은 배우들이 겹쳐서 말을 할 경우가 있습니다. 배우들은 자연히 서로 대사가 겹치지 않도록 하는 버릇이 되어 있어서, 이런 장면을 찍을 떄는 연습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소리 자체가 잘 안 들리기도 합니다. 원래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거기에 나오는 인물에게도 잘 안 들리고, 관객에게도 잘 안 들리는 거죠. 또 어떤 작업을 할 때 모든 게 깨끗하게 빨리 진행되지 않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supermarket에 가서 cart를 빼더라도 보통 영화에서는 한번에 착 빠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만은 않은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뭐를 어떤 도구에 싣고 가는 게 있는데 거기서 약간 한번에 빨리 안되거든요. 그게 다른 영화였다면 실수니까 다시 찍겠지만, 이 영화는 그걸 그냥 사용한 건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렇게 연출한 건지 헷갈릴만큼 실제 우리 생활처럼 나옵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슬프지만 군데군데 웃음이 나오는 장면도 있고요. 등장인물중에 입이 거친 사람이 좀 있어서 보신다면 미리 알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큰 사건을 겪고나서 달라진 주인공이 있고, 그 주인공과 가족과의 관계도 그리지만, 궁극적으로는 주인공과 자신과의 관계를 보는 거라고도 하겠습니다. 결말은 물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몇몇 분은 미국영화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French 영화같지도 않은 그런 결말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보시고 나면 같이 본 사람과 대화할 거리는 많이 생기는 영화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아까 미국의 현재 상황이 이 영화에 대한 반응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했죠. 다름이 아니라 이번 미국 대선으로 인해 더 조명을 받게 된 소외받은 백인 계층이 있지 않습니까? 그 계층의 영화다,라고 표현을 한 평론가도 있고요. 또 Samuel L. Jackson이라는 배우는 이 영화를 포함한 몇 작품에 대해 awards season용으로 나온 영화라고 비판을 했죠. 특히 이 영화에 대해서는 “not an inclusive film”라고 했는데요. 즉 모두에게 공감을 살만한 영화는 아니라는 얘기죠.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이 백인이라는 것만을 뜻하는 건 아니고요. 물론 이 영화에서 몇몇 인물들은 상상으로만도 끔찍한 비극이 있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관객이 감동을 받거나 공감하게 되는 건데요. 그렇지만 예를 들어 guardian을 재정문제로 못하겠다는 게 아니라는 거죠. 어부로 일하던 죽은 형은 집도 자기 집이고 배도 자기 배가 있거든요. 그 조카도 돈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하는 게 아니고요. 이런 시각이 예전에는 덜했을텐데 요즘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떤 것도 이런 관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들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졌다고 할까요.
오늘 노래는 이 영화 soundtrack에 나오는 곡 중에서 “I’m Beginning to See the Light”이라는 jazz standard입니다. Ella Fitzgerald의 노래로 들으시겠습니다.